나라의 성

나라에는 300여 개의 성이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야마토국(나라 지방의 옛 지명)의 북부뿐만 아니라 중부, 남부에도 다수의 성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 장소에 성이 축조되었던 의미, 성의 특징, 성이 맞이한 운명 등을 통해 나라의 역사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각 페이지는 4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축성에서 성의 최후까지 살펴보는 ‘성의 역사’. 교과서에는 실려 있지 않은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성에 관한 에피소드’. 성을 방문하면 꼭 봐야 할 곳을 소개하는 ‘현지 탐방’. 그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성의 의미에 관해 묻는 ‘지역 주민들에게 성은 어떤 의미?’.
나라의 성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몬

다몬성은 1559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축성되었습니다. 미켄지야마산(현 나라시 호렌초)에 위치한 평산성으로, 동서로 약 100m, 남북으로 약 100m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미켄지야마산은 훗날 다몬산이라 불리게 되는데, 도다이지 절과 고후쿠지 절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교토와 나라를 잇는 교카이도 길을 장악할 수 있는 등, 야마토를 지배하는 거점으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성의 특징으로는 훗날의 천수각에 해당하는 4층 망루와, 훗날 다몬야구라라 불리는 장옥(長屋) 형태의 망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근세 성곽의 선구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고리야마

1580년에 쓰쓰이성의 쓰쓰이 준케이가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고리야마성을 하사받아 입성. 폐성된 다몬산성에서 큰 돌들을 가져오고, 나라 지역의 목수들을 불러모아 축성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당시에 아케치 미쓰히데도 공사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남동생인 히데나가가 입성하여 야마토 100만석(石)의 영주에 걸맞는 성을 건축하기 시작합니다. 가스가타이샤 신사의 미즈야가와강에서 큰 돌들을 잘라내 가져왔으며 사원의 주춧돌, 오륜탑, 지장보살 석상 등에 사용되었던 돌들이 석축에 재사용되었습니다.

우다마쓰야마

우다마쓰야마성은 14세기 중엽에 우다 3장수 가운데 한 사람인 아키야마에 의해 축성되었습니다. 표고 473m의 산 정상에 위치한 산성으로, 유구를 통해 천수각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일본 동부 세력을 견제하기에 최적인 장소에 있었으며 야마토코리야마성, 다카토리성과 함께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야마토국 지배의 요충지였습니다. 단기간에 빈번한 성주의 교체가 이루어졌지만, 다가 일족의 가문이 새겨진 도깨비 기와가 발굴된 것으로 볼 때, 8년간 성주를 역임한 다가 히데타네 시절에 대규모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기산

시기산성은 1536년에 기자와 나가마사에 의해 축성되었습니다. 표고 437m의 시기산 정상(오다케)에 위치한 전국시대의 전형적인 산성으로, 시기 너머의 길을 장악함으로써 야마토 지배 거점으로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성곽의 범위는 남북으로 약 700m, 동서로 약 550m에 달하며, 나라현 내에서 최대 규모의 산성입니다.
1542년에 기자와 나가마사가 다이헤이지 전투에서 패배하여 성은 한때 소실되었지만, 나라 지역으로 들어온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1559년에 수리하여 대규모 성곽을 구축하였습니다.

다카토리

다카토리성은 1332년에 남조의 호족이었던 오치 구니즈미가 가이부키 산성의 지성으로 축조한 산성입니다. 당초에는 중세 성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키아게 성(간단한 해자와 토루를 갖춘 정도의 성)이었지만, 훗날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가신인 혼다 도시히사 등에 의해 본격적인 수리가 이루어져 근세 성곽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산기슭에서 혼마루까지의 390m에 달하는 고저차는 일본에서 가장 큰 것으로, 오카야마의 빗추 마쓰야마성, 기후의 미노 이와무라성과 함께 일본 3대 산성 중 하나로 꼽힙니다. 성 내의 둘레는 약 30km, 석축 내의 둘레는 약 20km로 추정되는데, 이는 히메지성과 같은 규모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