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탐구! 역사문화 자원
나라현의 불교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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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의 역사와 불교와의 관계
- 나라의 역사와 불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불교는 ①전래, ②수용을 둘러싼 분쟁, ③호족에 의한 숭배, ④국가에 의한 도입, ⑤민간으로의 확산 등 다양한 변천 과정을 겪었는데, 이러한 불교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들은 나라를 무대로 펼쳐졌습니다. 또한 나라에는 난토 7대 사찰(도다이지 절, 사이다이지 절, 호류지 절, 야쿠시지 절, 다이안지 절, 간고지 절, 고후쿠지 절)을 비롯한 사찰들과 이와 관련된 역사문화 자원 등, 불교와 관련된 문화 자원도 풍부합니다. 또한 구카이 스님이 나라 시대의 밀교를 계기로 새로운 불교의 문을 여는 등, 나라 불교는 그 이후의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라의 역사는 불교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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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전래
- 6세기 중엽(538년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긴메이 천황 시대에 백제의 성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냈습니다. 이른바 불교 전래입니다. 도착한 불상을 보고 긴메이 천황은 ‘부처의 얼굴이 빛을 발한다’라며 도금된 불상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가적 입장에서는, 종래의 토착 종교인 고신도(古神道)가 있음에도 ‘전래된 종교’로서의 불교를 수용하는 데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에는 국가가 둘로 나뉠 만큼의 분쟁이 일어났고, 불교 배척을 외친 모노노베씨 일족을 소가씨 일족이 제압함으로써 불교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아스카 지방에는 아스카데라 절, 다치바나데라 절, 가와라데라 절 등이 차례차례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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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토쿠 태자의 활약
- 스이코 천황의 황태자가 된 쇼토쿠 태자는 국가의 정치에 불교의 가르침을 반영하였습니다. 태자는 2세 무렵에 이미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했다고 하며, 나라현 내에는 ‘쇼토쿠 태자 2세 입상’이 세워져 있는 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또한 태자는 불교를 연구하기 위해서 속세와 멀리 떨어진 이카루가노미야 궁에 거주하였는데, 그곳에서 아스카까지 비스듬히 직선으로 이어진 ‘태자길’이라고 하는 당시의 고속도로를 흑마를 타고 매일 출퇴근했다고 합니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 최초의 불교주석서를 3권 저술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산교기쇼’). 태자의 가르침은 ‘세상은 허상이며, 단지 부처만이 진리이다’, ‘악한 일을 행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하여라’와 같은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사람들을 깨우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본적으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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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차례의 수난을 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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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현의 불교는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경험하였습니다. 1181년에 겐페이 합전을 계기로, 도다이지 절과 고후쿠지 절 등 많은 건물이 불탔으며, 전국시대에는 현재의 헤구리초의 시기산에 거성을 두고 있던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미요시 삼인방과 대립하였는데, 하필이면 도다이지 절이 전투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1567년에 격렬한 전투로 인해 도다이지 절 대불전은 소실되었으며, 대불도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고케이 큰스님에 의해 대불전이 재건된 것은 1709년입니다.
또한 메이지 정부는 신불 분리령을 반포하여, 신도와 불교를 명확히 나누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불교를 폐하고 석가의 가르침을 버리자’는 이른바 폐불훼석 운동이 일어나, 나라현에서도 덴리에 있던 우치야마에이큐지 절이라는 큰 사찰이 소실되었고, 고후쿠지 절의 건물이 파괴되는 등, 많은 사찰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나라현의 불교와 불교 관련 사찰들은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라현에는 난토 7대 사찰뿐만 아니라 세계유산 ‘기이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에도 등재된 슈겐도의 영지와 슈겐의 길,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 민중에게 큰 영향을 끼친 진언종계의 사찰 등, 불교와 관련된 장소가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의 ‘역사문화자원 데이터베이스’를 참고로, 불교와의 관련을 통해 역사문화자원을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감수: 나라대학 문학부 사학과
데라사키 야스히로 교수